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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미쉘 바스키아의 일생 ― 거리, 영웅, 예술

모던피라미 2024. 8. 2.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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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대학로의 어느 골목에는 '바스키아'라는 작은 바가 있었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따라 조심스럽게 지하로 내려가면 마치 숨겨진 동굴처럼 바의 모습이 펼쳐졌다. 벽면에는 온통 바스키아의 그림들이었다. 주로 늦은 밤에 갔다. 친구 한두 명과 함께. 테이블 자리에 앉아 맥주나 칵테일, 와인 한잔 등을 걸치며 얘기를 나눴다. 친구가 화장실을 가거나, 잠시 대화가 끊겼을 때 벽면의 바스키아의 자화상들과 눈을 맞추며 멍해지는 순간들이 좋았다. 바에서는 종종 라이브 밴드의 공연이 열리기도 했다. 바에 앉은 사람들은 어른스러워 보였다. 바스키아에는 내 20대의 불안한 밤들이 스몄다. 그리고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 버렸다. 아직도 너무 그리운 곳. 처음으로 '장 미쉘 바스키아'라는 화가를 알게 해 준 곳이다.

 

Untitled (1982)
Untitled (1982)

 

'검은 피카소' '미국의 고흐' 등으로 불린 천재 그라피티 아티스트, 바스키아. 그는 1960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아이티공화국 출신 아버지와 푸에르토리코 계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가 생을 마감한 나이는 28세. 헤로인 약물중독으로 사망했다. 너무 짧은 생이었지만, 1980년대 초 뉴욕 화단에 혜성처럼 나타나 8년이라는 시간 동안 무려 3,0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그의 광기 어린 듯한 열정적인 작품 활동은 그를 미술사에서 특별한 위치에 자리시켰다.

그는 '낙서'라는 행위를 통해 예술과 비(非) 예술의 장벽을 허무는 돌파구 역할을 했다. 금전적 가치, 죽음과 관련한 그만의 시적인 문구 등은 그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구축하는 한 축이다. 자유와 저항의 에너지가 넘치는 그의 작품은 현대 시각 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1984년 경매에서 2천3백만 원($19,000)에 판매된 1982년 작품이 2017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1,380억 원($110, 5 million)에 낙찰되면서 명실상부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최고의 작가임을 증명했다.

 

바스키아의 어린 시절

바스키아는 세 살 무렵부터 그림을 그리는 등 미술에 소질을 보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예술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바스키아는 어머니와 함께 미술관을 다니며 예술적 감각을 길렀고, 스페인어나 프랑스어 등 외국어를 배울 정도로 나름 유복한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그가 7살 때 부모님은 이혼했고, 엄마와 떨어져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바스키아는 방황한다. 10대가 된 바스키아는 학교를 자퇴하고 집에서 나와 길거리 소년이 된다. 그리고, 유색인종에 대한 경멸 어린 사회의 시선, 펑크족과 힙합, 브레이크 댄스 등의 영향을 받아 특유의 반항 의식을 거리의 낙서로 그려내기 시작한다.

세이모(SAMO) 시절 바스키아
세이모(SAMO) 시절 바스키아

 

바스키아와 SAMO

바스키아가 낙서를 예술로 승화시킨 것은 1977년 SAMO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부터다. 'SAMO'는 바스키아와 그의 친구 알 디아즈(Al Diaze)가 함께 마리화나를 피우다가 만들어낸 이름이자, 가공의 인물이다. 환각 상태에서 바스키아가 "SAMe Old shit"이라고 말한 것을, 앞 글자를 조합해 짧게 변조했다. 그들은 지하철과 로어 맨해튼에 스프레이 페인트로 그림을 그리고 철학적인 문구를 써넣었고, 가상의 화가 'SAMO'는 곧 뉴요커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들은 뉴욕의 현대 박물관 앞에서 티셔츠와 엽서에 그림을 그려 넣어 팔기도 했다. '소호 뉴스'가 SAMO의 낙서화를 지면에 실으며 더욱 유명해졌다. 그러나 바스키아와 알 디아즈의 의견 대립으로 1978년 겨울, SAMO는 해체하게 된다. 소호 거리에 새겨진 'SAMO는 죽었다'는 문구가 그들의 끝이었다.

 

SAMO IS DEAD (1979)
SAMO IS DEAD (1979)

 

 

바스키아의 데뷔

바스키아가 정식으로 화단에 데뷔한 것은 1980년, 그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참가한 '타임 스퀘어 Times Square Show’ (맨해튼 미드타운 근방의 빈 건물에서 열린 그룹 전)'를 통해서였다. 이 전시에서 그는 많은 호평을 얻으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화랑업자 브루노 비숍벨거와 전속계약을 맺었고, 떠오르는 신예작가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1981년, 인기에 힘입어 그는 다운타운 미술계 이야기를 담은 영화 '뉴욕 비트'의 주인공도 맡았으며, 이탈리아의 갤러리아 아르테 에밀리오 마촐리(Galleria d’Arte Emilio Mazzoli)에서 ‘SAMO’란 이름으로 첫 개인전도 열었다. 1982년 아니나 노세이 갤러리에서 미국 첫 개인전을 열었으며, 그 해 6월 그해 6월 유럽의 가장 권위 있는 전시 중 하나인 '카셀 도큐 멘타 7 Kassel Documenta 7'에 출품하며 바스키아는 세계적인 명성을 쌓아갔다.

 

 

▲ New York Beat Movie AKA Downtown 81 - Trailer (1981)

 

바스키아와 앤디워홀

1980년, 바스키아는 앤디 워홀을 만나게 된다. 바스키아의 천재성을 단번에 알아본 워홀은 자신의 스튜디오인 '팩토리'에 자유롭게 드나들게 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워홀은 그의 재력과 타고난 마케팅 실력을 바탕으로 바스키아의 몸값을 끌어올렸고, 바스키아는 더욱 유명해졌지만 어느덧 감당할 수 없는 성공의 무게로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됐다.

'바스키아는 워홀에게 이용당했다', '워홀과 바스키아는 동성연애 중이다'와 같은 루머에 시달리며 바스키아는 유명세의 어두운 면을 체감한다. 그는 1983년과 1985년, 워홀과 협업한 전시를 개최하지만 미술계의 혹평을 받으며 실패한다. 이 실패를 계기로 둘의 공동작업은 막을 내리게 된다.

지속적으로 흑인 영웅들을 그려왔던 바스키아는 1986년 단순한 관심을 넘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깊은 고찰로써 아프리카 코트디 부아르공화국(République of Côte d’Ivoire)에서의 전시를 개최한다. 그러다 1987년, 아버지와도 같았던 앤디 워홀이 수술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바스키아는 큰 충격을 받는다. 바스키아에게 워홀은 성공의 큰 발판이 되어준 종교와도 같은 존재였고, 가족보다도 깊은 인물이었다. 바스키아는 코트디부아르로 이주할 결심을 하지만, 이주를 엿새 앞두고 1988년 8월 12일, 마약 남용으로 사망한다. 워홀이 사망한 지 꼭 1년 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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