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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일곱 해의 마지막>, 북한 체제 속 시인 백석의 번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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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일곱 해의 마지막>, 북한 체제 속 시인 백석의 번뇌

모던피라미 2024. 8. 13.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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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작가의 <일곱 해의 마지막>은 2020년 7월 1일 출간됐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이후 8년 만의 장편 소설이었다. 이 소설의 모티프가 된 것은 한국전쟁 이후 급격히 변한 세상 앞에 선 시인 '백석'의 삶이다. 백석의 본명은 '백기행'. 소설의 주인공이 바로 '기행'이다.

김연수 장편소설, 일곱해의 마지막

 

백석의 마지막 7년, 사회주의 속 시인의 고뇌를 복원하다

<일곱 해의 마지막>은 1957년부터 1963년까지, 백석이 시인으로 살았던 마지막 7년을 작가적 상상력으로 복원해 낸다. 백석은 1930~40년대 시인으로 이름을 알렸지만, 한국전쟁 후 북한에서 그는 시인보다는 러시아문학 번역가에 가까웠다. 1948년 '남신의주 유시동 박시봉방'을 발표한 뒤 작품 활동을 하지 않다가 1956년 동시 작가로 활동을 재개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1962년 발표한 '나루터'를 끝으로 더 이상 글을 쓰지 않았다.

조선작가동맹은 당의 창작 지침에 맞는 사상성 강한 시를 요구했고, 그의 시는 순수문학의 잔재가 남아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찬양 시를 쓰면 살아남고, 거부하면 숙청되는 운명 앞에서 기행(백석)은 어떤 시도 쓰지 않는 쪽을 택한다. 당이 요구하는 시는 그가 '평생 혼자서 사랑하고 몰두했던' 언어로 이뤄진 세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설의 초반부에는 기행의 친구 준이 당의 행태에 대해 아래와 같이 비판한다. 당이 내려주는 하나의 사상에 맞춰 모든 인민의 세계관과, 가치관과, 생각을 '개조'하는 것. 얼마나 기괴하고 끔찍한 일인지, 준의 말로써 상상할 수 있다.
 

"외로움을 나쁜 것이라고만 생각하니까 그럴 수밖에. 외로워봐야 육친의 따스함을 아는 법인데, 이 사회는 늘 기쁘고 즐겁고 벅찬 상태만 노래하라고 하지. 그게 아니면 분노하고 증오하고 저주해야 하고. 어쨌든 늘 조증의 상태로 지내야만 하니 외로움이 뭔지 고독이 뭔지 알지 못하겠지. 요전에는 종로의 한 화랑에서 그림을 봤는데, 무슨 제철소인가 어딘가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그려놓았더군. 그런데 철근을 멘 노동자들이 모두 웃고 있더라구.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 슬픔을 모르는 인간, 고독할 겨를이 없는 인간. 그게 바로 당이 원하는 새로운 사회주의 인간형인가 봐. 그러니 나도 웃을 수밖에."

"이건 마치 항상 기뻐하라고 윽박지르는 기둥서방 앞에 서 있는 억지춘향의 꼴이 아니겠나. 그렇게 억지로 조증의 상태로 만든다고 해서 개조가 이뤄질까? 인간의 실존이란 물과 같은 것이고, 그것은 흐름이라서 인연과 조건에 따라 때로는 냇물이 되고 강물이 되며 때로는 호수와 폭포수가 되는 것인데. 그 모두를 하나로 뭉뚱그려 늘 기뻐하라, 벅찬 인간이 되어라, 투쟁하라, 하면 그게 가능할까?"

30~31p

 

침묵 속에서 찾아낸, 시(時)의 참된 가치

희망도 꿈도 없이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하는 엄혹한 현실 속에서 기행은 번뇌한다. 쓰고 싶은 시를 쓰지 못하고, 쓰기 싫은 시를 쓰라는 압력 앞에서 기행은 침묵과 수모를 감당한다. 기행과 그와 가까운 주변 인물 들은 이 소설의 곳곳에서 '시'에 대해 말하고 생각한다. 시란 본디 무엇인가. 그 존재의 의미와 힘, 시로써 지켜야 하는 가치, 그리고 원하는 언어로 원하는 시를 쓰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것들에 대해.

그러다가 「겨울밤」이라는 시를 발견했다. 러시아어로 쓰인 그 시를 읽어가며 그는 상상했다. 거친 바람에 눈보라 천지가 된 세상을 상상하고, 혼자 있는 방창 밑의 책상 위에서 옹골차게 타오르는 촛불 하나를 떠올렸다. 그다음은 겨울의 촛불이 꾸는 여름의 꿈과, 붕붕대는 소리를 내며 날벌레가 날아드는 꿈을, 요란스레 창문을 흔들며 그 꿈을 깨우는 눈바람을 생각했다. 그렇게 그는 시를 한 줄 한 줄 외워나갔다. 그리고 종이를 한장 넘기니 거기 옆의 여백에 손으로 쓴 한글 문장이 나왔다.

시대의 눈보라 앞에 시는 그저 나약한 촛불에 지나지 않는다. 눈보라는 산문이며, 산문은 교시하는 것이다. 당과 수령의 말은 눈보라처럼 휘몰아치는 산문이다. 준엄하고 매섭고 치밀하다. 하지만 시는 말하지 않는다. 시의 할 일은 눈보라 속에서도 그 불꽃을 피워 올리는 데까지다. 잠시나마 타오르는 불꽃을 통해 시의 언어는 먼 미래의 독자에게 옮겨붙는다.

80~81p
그즈음, 기행은 『조선문학』 9월호에 '나의 항의, 나의 제의'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이 글은 협동조합과 공장에 관한 것이라면, 내면을 깊이 추구하지 않아도, 문학적 감동이 없어도 무조건 좋은 시라고 말하는 당시의 시단에 대한 정면 공격이었다.

어린 시절로부터 벌써 새나 개구리나 풀이나 꽃에서, 인형에서, 갖은 장난감에서, 비와 눈, 어머니와 동생들, 또 동물들에게서 아름다움과 사랑을 찾을 수 있도록 아동들을 교양할 때에라야만 그들은 자라서 의로운 일에 제 목숨을 희생할 수 있으며 사람을 열렬히, 충실하게 사랑할 수 있으며, 사업에 강의한 정열을 기울일 수 있으며, 인류 사회의 커다란 아름다움을 감수할 수 있으며,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사악한 것들과 용감하게 싸울 수 있는 사람들로 될 수 있다는 것을 거듭 말하여야 할 것이다. 현실의 벅찬 한 면만을 구호로 외치며 흥분하여 낯을 붉히는 사람들의 시 이전의 상식을 아동시는 배격한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서 보는 인간 감정의 복잡성을 무시하려는 무지한 기도를 아동시는 타기한다. 시는 깊어야 하며, 특이하여야 하며, 뜨거워야 하며 진실하여야 한다.

104~105p
그 시절의 새벽, 기행의 이웃들은 아직 푸릇푸릇한 기운이 감도는 대동강변을 따라 하염없이 걷거나 제자리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을 거의 매일 목격했다. 눈만 돌리면 보이는 그 유령과도 같은 이미지는 마치 기행이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었다. 꽉 막힌 세계 속에서 오갈 데 없이 헤매는 기행의 비판받는 자아들처럼. 그렇게 서서, 혹은 버드나무 몇 그루 아래를 걸어갔다가 되돌아오며 기행은 누군가의 명백한 악의마저도 자기 운명의 일부로 여겨야만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시를 쓰는 일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137p

 
 

쓰지 않을 자유

다시금 자유에 대해 생각한다.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김연수 작가는 "백석은 쓰지 않음으로써 지금의 '백석'이 됐다"면서 "어떤 순간에는 '안 쓰는 것'이 위대한 글을 쓰는 것과 버금가는 일이라는 걸 역설적으로 깨달았다"고 말했다. "어릴 땐 하고 싶은 걸 하고, 쓰고 싶은 걸 쓰는 게 자유라고 생각했어요. 이제는 쓰지 않을 수 있는 힘, '삼가다'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요. 그것이야말로 '어른' 들의 세상이고, 어른들이 짊어지는 '고통'이죠."
 

아무런 표정을 짓지 않을 수 있는 것, 어떤 시를 쓰지 않을 수 있는 것, 무엇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수 있는 것.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고차원적인 능력은 무엇도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었다. 상허의 말처럼 들리는 대로 듣고 보이는 대로 볼 뿐 거기에 뭔가를 더 덧붙이지 않을 수 있을 때, 인간은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 1958년 북한의 사람들에게 자유가 전혀 없었다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다. 그들은 들으라는 대로 듣고, 보라는 대로 봐야만 했다. 그리고 그들은 말하라는 대로 말해야만 했다.

86p

 
 

시대가 요구하는 것, 내가 지켜야 하는 것

김연수 작가는 국립중앙도서관 자료실에서 과거 북한에서 나온 잡지나 신문을 읽으며 백석의 삶을 취재했다고 한다. 1970년생인 작가는 올해 쉰 살이 됐는데, 공교롭게도 백석이 마지막 시를 발표한 나이도 쉰 살이었다. 그는 작가의 말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그런 그에게 동갑의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그저 사랑을 잃고 방황하는 젊은 기행에게는 덕원신학교 학생들의 연주를 들려주고 삼수로 쫓겨간 늙은 기행에게는 상주의 초등학생이 쓴 동시를 읽게 했을 뿐. 그러므로 이것은 백석이 살아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자, 죽는 순간까지도 그가 마음속에서 놓지 않았던 소망에 대한 이야기다. 백석은 1996년에 세상을 떠났고, 이제 나는 시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 된 그를 본다.

246p

 

한 작가의 상상과 이야기는 그 오래전 사라진 어떤 시인을 새롭게 환생시키고, 우리는 그 안에서 쓸 자유를 잃을 바에 쓰지 않음을 택했던 시인의 울음 없는 슬픔을 본다. 백석이 살았던 시대와 공간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르지만, 어쩐지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묘하게 겹쳐 보였다. 김연수 작가는 소설을 쓰지 않았던 지난 몇 년 간 괴로웠다고 한다. 어렵고 깊은 이야기에 대해 쓰려는데 "요즘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들 것"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시대가 요구하는 것, 이를테면 쉽게 읽히는 소설을 쓰고 가벼운 주제를 다루는 쪽으로 변해야 하는지 고민했다고.

그러나 그는, 쓰면서 자연스레 변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자신이 잘하고 좋아하는 걸 시대에 맞춰 억지로 바꿀 필요는 없겠다는 결론을 냈다고 한다. 김연수 작가의 뜻을 응원하며, 한편으로는 반성했다. 혹시 나도 고민 없이 소비할 수 있는 무언가에 익숙해져 가는 건 아닌지. 적어도 내가 보고 배운 문학의 가치와 아름다움은, 예나 지금이나 작가들의 깊은 고뇌와 성찰로부터 닦여 나온 것들이었다. <일곱 해의 마지막>은 내게 그런 경종을 울려주었다.
 

김연수 작가 사인
김연수 작가의 사인. 나는 603번째 책을 갖게 됐다. '고조곤히'라는 말은 '고요히, 소리 없이'라는 뜻.

 

그리고, 알알이 남은 아름다운 문장들

마지막으로, '바로 그 순간의 기행'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생생한 표현들에 감사한다.
 

그런 생각을 하며 차창 밖을 내다보면 부드럽게 융기하는 낮은 구릉들의 희미한 윤곽 위로 별들이 도글도글 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울란우데에 도착해 역 앞으로 나가니 벨라와 마찬가지로 밤새 차를 타고 달려온 빅토르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새 그의 얼굴과 두 팔은 볕에 그슬려 감실감실했다. (23p)

폐허가 된 수도원에서 들리는 종소리처럼 궁근 목소리가 벨라의 마음을 울렸다. (35p)

기행은 평양의 밤 풍경을 바라봤다. 높이 솟은 기중기와 하나둘 재건된 웅장한 관청들과 그 너머에 가려진 누추한 움막들 위로 교교한 달빛이 공평하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53p)

그러는 동안에도 눈은 그의 머리 위에, 어깨 위에, 신발 위에 내려 쌓였다. 그는 그 거리에서 곧 지워질 것처럼 보였다. (70p)

장황한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기행은 함흥의 영생고보에서 영어 교사로 근무하던 시절을 떠올렸다. 초여름이면 포플러나무가 서 있는 운동장에서 학생들과 공을 차곤 했는데, 이따금 아카시아 냄새가 훅 밀려와 정신이 아득해질 때가 있었다. 그럴 때면 그 자리에 멈춰 서 공을 향해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십년 뒤, 혹은 이십 년 뒤 저 아이들은 어디서 어떤 일들을 하고 있을까 생각하곤 했다. 그때만 해도 자신은 그 아름다운 북관의 도시에서 선생으로 늙어갈 줄 알았다. (114p)

정말 영원한 것은 없을까?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위를 걸으며 기행은 생각했다. 신발 밑에서 눈이 다져지는 소리가 들렸다. (118p)

찬 기운이 밀려드는데도 병도는 창을 닫지 않았다. 이윽고 회색 하늘에서 다시 눈송이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눈 치우는 소리가 멀어지는가 싶더니 눈이 쏟아지며 무채색의 고요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묵음과 무채색, 그것은 그즈음 기행의 내면 풍경과 같았다. 거기에는 어떤 의미도 찾을 길이 없는 비애뿐이었다. (148p)

그때 기행과 벨라는 잠시 빗소리 안에 있었다. 그 소리에는 멀고 가까운 느낌이 없었다. 모든 것은 멀리, 그 소리 바깥에 있었다. 그 바깥에는 파도 소리도 있었고 바람 소리도 있었지만, 빗소리에 가려 들리지 않았다. 낮 동안 찌물쿠던 기운이 단숨에 씻겨나갔다. (160p)

그 눈 때문에 깊은 밤, 기행은 이따금 이깔나무와 소나무와 가문비나무의 숲으로 가곤 했다. 숲속에서 귀를 기울이노라면 작고 가벼운 것들이 차곡차곡 쌓이는 소리가 들렸고, 때로는 그것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가지가 꺾이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그런 밤이면 숙소로 돌아온 뒤에도 쉽게 잠들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눈송이들처럼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던 인생의 자잘한 일들이 시간의 더께를 뒤집어쓴 채 그의 마음을 짓눌렀다. (170~171p)

Ne pas se refroidir, Ne pas se lasser (냉담하지 말고, 지치지 말고)(180p)

그때 세상은 아름다운 것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따뜻한 것들로, 좋아하는 것들로, 다정한 것들로. 이를테면 잘 길들여진 돼지처럼 순하고, 남국의 산록같이 보드라운 것들로. 그때는 세상 모든 것이 두 겹으로 이뤄져 있다는 사실을, 사랑이 있다면 그 뒷면에는 미움이 있고 즐거움과 괴로움은 서로 붙은 한몸이라는 사실을 아직 모를 때였다. (185p)

그 순간, 기행이 가꿔온 믿음의 세계는 단숨에 무너졌고, 그 이후의 삶은 왜 그래야만 했는지 따져보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 (18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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