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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여행의 이유>, 여행하는 인간에 대해

모던피라미 2024. 8. 6.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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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좋아하세요?" 최근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누구와도 흔히 주고받는 질문인데, 이번엔 어쩐지 좀 낯설었다. 여행을 좋아하는 것 같긴 한데, 아주 열정적으로 여행을 다니는 '여행가'들에는 비할 바가 아닌 것 같고. 어떤 이유에서 여행을 하느냐고 묻는다면 쉽게 대답하지 못할 것 같다. 여행을 하는 것은 익숙한 일이지만, 여행에 대해 숙고해 본 적은 없는 셈이었다.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는 2019년 4월 출간된 즉시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렸다. 교보문고, 예스24 등 여러 대형서점에서 2019년 '올해의 책' 등으로 꼽힐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책에는 '여행'에 대한 작가의 경험과 생각이 담긴 9개의 글이 담겨있다. 책의 내용은 제목 그대로다. 우리는 여행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왜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는지. 여행으로 얻는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이야기는 글쓰기와 삶의 범주로 확장된다.
 

김영하 &lt;여행의 이유&gt;, 문학동네, 2019
김영하 <여행의 이유>, 문학동네, 2019

 

여행과 삶


여행은 예로부터 삶의 메타포로 자리했다. 여행은 삶의 축소판과 같다. 우리가 계획한 대로 이루어질 확률은 어쩌면 희박하고, 모든 것은 예측을 불허한다. 우리는 그런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오는 과정에서 자신과 세계에 대해 깨닫고 배운다.
 

그렇다면 여행기란 본질적으로 무엇일까? 그것은 여행의 성공이라는 목적을 향해 집을 떠난 주인공이 이런저런 시련을 겪다가 원래 성취하고자 했던 것과 다른 어떤 것을 얻어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 18-19p, '추방과 멀미' 中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 51p, '추방과 멀미' 中

 

현실은 줄거리가 없다. 어떤 일들이 불쑥불쑥 일어난다. 때로 우리의 통제력을 벗어난다. 아름다운 별똥별이라고 생각하고 쳐다보던 무언가가 거대한 운석으로 우리 머리 위로 떨어질 수도 있다. 대단한 일처럼 생각하고 긴장했지만 별일 아닌 것으로 판명되기도 한다. 우주는 우리의 운명에 무심하며 우리는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
- 201p, '여행으로 돌아가다' 中

 
 

여행의 이유


 철학가 가브리엘 마르셀은 인류를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여행하는 인간으로 정의했다. 작가는 이 말을 빌려, 인간은 끝없이 이동해왔고 그런 본능이 우리 몸에 새겨져있다고 말한다. 각자가 가진 여행의 이유는 모두 다를 것이다. 나의 경우엔 '노바디의 여행'에서 다뤄진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는 순간을 즐기기 위한 이유가 큰 것 같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도시에 도착했을 때 오롯한 자유와 무한한 해방감을 느낀다. 그저 무명의 한 여행객이 되어 낯선 공간을 탐험하는 기분은 일상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특별함이다.

이름도, 나이도, 직업도 밝히지 않아도 되는 곳에서 며칠이고 있다보면 나 자신에게 더욱 집중하게 된다. 새로운 환경에 나를 던져놓고, 내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어떤 것에 감동하는지, 어떤 것을 후회하는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조금 더 또렷하게 알게 된다. 여행은 어쩌면 미지의 세계가 아니라, 미지의 나를 공부하기 위해 떠나는 것일지 모른다.
 

여행지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여행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사회적으로 나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때로 감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러 떠나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 180p, '노바디의 여행' 中

 

우리는 모두 정해진 일정이 무사히 진행되기를 바라며, 안전하게 귀환하기를 원한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우리의 내면에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강력한 바람이 있다. 여행을 통해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고, 자신과 세계에 대한 놀라운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 그런 마법적 순간을 경험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 22p, '추방과 멀미' 中

 
 

작가로서의 여행

 
<여행의 이유>가 재미있었던 것은 작가의 글 쓰는 과정과, 여행이 글쓰기에 미친 영향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작가는 여행에 대해 쓰며 그가 읽었던 여러 책들과 영화들을 다양하게 소개한다(맨 아래 정리해두었다). 예술가들이 어떤 것을 보고 듣는지 알게 되는 것은 언제나 흥미롭다.
 

학생들이 만들어온 인물들은 대체로 모호하다. 주인공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는 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그냥 평범한 회사원(대학생, 공무원 등등)이에요.' 그럴 때 이렇게 말하는 것이 선생으로서의 나의 역할이었다.
"평범한 회사원? 그런 인물은 없어."
 모든 인간은 다 다르며,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조금씩은 다 이상하다. 작가로 산다는 것은 바로 그 '다름'과 '이상함'을 끝까지 추적해 생생한 캐릭터로 만드는 것이다.
- 57p, '상처를 몽땅 흡수한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中

 

오래 살아온 집에는 상처가 있다. 지워지지 않는 벽지의 얼룩처럼 온갖 기억들이 집 여기저기에 들러붙어 있다. 가족에게 받은 고통, 내가 그들에게 주었거나, 그들로부터 들은 뼈아픈 말들은 사라지지 않고 집 구석구석에 묻어 있다. 집은 안식의 공간(이어야 하)지만 상처의 쇼윈도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족 간의 뿌리 깊은 갈등을 다룬 소설들은 어김없이 그들이 오래 살아온 집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 64p, '상처를 몽땅 흡수한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中

 

작가는 우렁찬 목소리보다는 작은 속삭임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자신 없는 음성으로 낮게 읊조리는 소심한 목소리에 삶의 깊은 진실이 숨어 있을 때가 많다. 그런 웅얼거림을 잘 들으려면 발화자 가까이에서 귀를 기울여야 한다.
- 79p, '오직 현재' 中

 

여행기는 모험 소설과는 다른 측면에서 나를 안심시켰다. 새로운 세계로 떠나는 것이 불안과 고통만은 아니라는 것. 거기에는 '지금 여기'에 없는 놀라운 것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것. 그리고 그것들은 끝이 없다는 것. 여행기의 저자 역시 모험 소설의 주인공들처럼 작은 사건과 사고들을 겪고 그것을 극복해낸다. 그리고 그들은 안전하게 돌아와 그것을 글로 기록한다. 모든 인간에게는 삶의 중심이 되는 이야기의 구조, 핵심 플롯이 있다. 어린 날의 나에게 그것은 모험 소설이었고 여행기였다.
- 198p, '여행으로 돌아가다' 中

 
 

여행의 자세

 
여행이란 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할 것인가. 그것은 삶을 대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과 같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알 수도 없다.' 작가의 이 말이 참 위로가 됐다. 그러므로 결론은 '현재를 즐기자'는 것도. 우리 모두가 거대한 인류의 역사에 잠시 등장했다 떠나는 여행객이다. 우리는 그 어느 곳에도 영원히 머물지 않는다. 삶을 단 한 번 떠날 수 있는 여행이라고 생각하다면, 어쩌면 우리가 괴롭게 품고 사는 많은 고민과 질문에 대한 답은 단순 명료해질지 모른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알 수도 없다. 그렇다면 그냥 현재를 즐기자. 현재는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여행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사람들과 마주 앉아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 미래는 포기하고 현재에 집중하자고 생각했고 그것은 사실 내가 모든 여행에서 택하는 태도이기도 했다.
- 109p,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여행' 中

 

시인 아치볼드 매클리시는 아폴로 8호가 달 궤도에 진입한 다음 날인 크리스마스에 발행된 뉴욕타임즈에 '저 끝없는 고요 속에 떠 있는 작고, 푸르고, 아름다운 지구를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바로 우리 모두를 지구의 승객riders으로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썼다. 인류가 지구의 승객이라는 비유는 지금으로서는 진부하게 들릴지 몰라도 당시에는 읽자마자 무릎을 칠 만한 것이었다. 승객은 영원히 머물지 않는다. 왔다가 떠나는 존재일 뿐이다.
- 136p, '아폴로 8호에서 보내온 사진' 中

 

인류가 한배에 탄 승객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 우주선을 타고 달의 뒤편까지 갈 필요는 없을 지도 모른다. 우리는 인생의 축소판인 여행을 통해, 환대와 신뢰의 순환을 거듭하여 경험함으로써, 우리 인류가 적대와 경쟁을 통해서만 번성해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달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지구의 모습이 그토록 아름답게 보였던 것과 그 푸른 구슬에서 시인이 바로 인류애를 떠올린 것은 지구라는 행성의 승객인 우리 모두가 오랜 세월 서로에게 보여준 신뢰와 환대 덕분이었을 것이다.
- 148p, '아폴로 8호에서 보내온 사진' 中

 


 

<여행의 이유>에서 언급된 책, 영화, 프로그램

 

  • 마르코 폴로 <동방견문록>
  • 로널드 B. 토비아스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무 가지 플롯>
  • 저자 미상 <길가메시 서사시>
  • 에드거 스노 <중국의 붉은 별>
  • 조너선 스위프트 <걸리버 여행기>
  • 김영하 <살인자의 기억법> <검은 꽃> <빛의 제국>
  • 데이비드 실즈 <문학은 어떻게 내 삶을 구했는가>
  • 중국의 고대 병법서 <삼십육계>
  • 프란츠 카프카 <성>
  • 조지프 콘래드 <암흑의 핵심>
  • 피에르 바야르 <여행하지 않은 곳에 대해 말하는 법>
  • 쥘 베른 <80일간의 세계 일주> <15소년 표류기>
  • 아델베르트 폰 샤미소 <그림자를 판 사나이>
  •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 실뱅 테송 <여행의 기쁨>
  • 호메로스 <오디세이아>
  • 존 크라카우어 <희박한 공기 속으로>

 

영화

  • <스텐바이, 웬디>
  • <사랑의 블랙홀>
  • <서편제>
  • <블레이드러너>(1982)

 

TV 프로그램

  • BBC 다큐멘터리 <인간 포유류, 인간 사냥꾼Human Mammal, Human Hunter>
  • tvN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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