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나 <말하기를 말하기>, 말하기에 관한 부드러운 간섭
『말하기를 말하기』는 말하기 마음가짐에서 시작해 누구보다 내성적이었던 작가가 어떻게 말을 업으로 삼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담담히 보여준다.
김하나 작가의 책 <말하기를 말하기>를 읽었던 것은, 출판사의 서평 한줄 때문이었다. 이 책에는 '읽고 쓰고 듣고 말하는 사람' 김하나 작가의 말하기 경험과 관련한 25개의 글이 실려있다. 팟캐스트 <책읽아웃>을 진행하며 '힘을 빼고' 말을 잘하기 위한 노력들, 양질의 대화에서 오는 감동, 여성으로서 목소리를 내는 것까지. 소소하지만 의미 있는 이야기들이 물 흐르듯 편안하게 흘러간다.
먼저 말을 거는 사람이 되기까지
이 책에 실린 글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화분에서 숲으로'라는 글이다. 저자가 '먼저 말을 거는 사람'이 된 계기에 대해 쓰여있다. 저자는 친구도 오래, 깊이, 만나는 사람들만, 연애를 시작하면 연인에게만 집중했다고 한다. 그러다 어떤 연애가 깨진 후 '낯선 사람들을 많이 만나보자'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이례적인 결정을 내리곤 스스로 모임장이 된다.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말을 걸고, 마음을 열고, 함께 새로운 것들을 한다. 누군가를 미리 재단하지 않고, 다양한 사람들 안의 각자의 세계에 호기심을 갖게 됨으로써 그 스스로의 세계를 넓힐 수 있었다고 말한다.
- 뭐든 해보는 게 안 하는 것보다 나았다. 예전의 나는 해보기도 전에 '이건 내가 좋아하는 게 아니야'라고 재단해버리곤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어떤 것이든 경험을 해보면 그 세계 속에는 나름의 재미와 지식과 감동이 있다는 걸 얕게나마 느껴볼 수 있었다.
- 그 시절 우리는 이 장면처럼 살았다. 서로가 서로를 껴안으며. 축축하면서도 따뜻한 곳에서 발효가 일어나듯이 내게도 그런 화학작용이 오랜 기간에 걸쳐 일어났다. 몇 년 간 마치 성격 개조 학교를 다니듯 집중적으로 마음 열기 수업을 쌓은 셈이었다.
- 중요한 것은 상대에게 마음을 열려는 태도다. 미리 재단하려는 마음 없이. 여기서 세계를 파악하는 두 태도의 차이를 읽을 수 있다. 즉 세계를 화분들의 집합으로 파악하느냐, 아니면 하나의 거대한 숲으로 이해하느냐. 좁은 화분을 벗어나 울창한 숲 속으로 나아가려면 우선 내 마음이라는 화분부터 깨버려야 할 것이다. 먼저 말을 건다는 건 내게 그런 의미였다.
('화분에서 숲으로' 中, 47-56p)
둘의 세계, 나의 세계
이 글이 유독 마음 깊이 와닿았던 이유는, 위 글에 쓰여진 저자의 당시 마음가짐이나 상황이 나의 그것과 꼭 같진 않지만, 많이 비슷하다고 느껴서다. 오래전에 함께 했던 오랜 연인과의 시간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한 사람을 알게 되고 오랜 시간 가깝게 지냈는데, 저자의 표현 따라 '그 사람과 나 둘만 심어진 화분' 같은 관계였다. 아주 바빠던 그는, 일 말고는 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어쩌면 나도 그랬다. 함께 보낸 시간이 길다 보니 나의 성향이나 성격도, 조용한 그를 조금씩 닮아갔다. 일과 타인들에 지치고 다치면 어김없이 둘만의 동굴로 들어갔다.
그 동굴이 깊고 아름다워질수록, 나를 둘러싼 세계는 좁아졌다. 나를 오랜만에 보는 회사 선배들은, 예전의 내 모습이 아니라며 실망한 티를 내거나 대놓고 한 마디씩 했다. 그들이 봤던 '예전의 내 모습'이란 아마도 욕심도 많고, 사람 만나기도 좋아하는 데다, 그만큼 낯선 이들에게 열려있고 호기심도 많았던 애였을 거다. 몇 년 사이에 난 그렇지 않은 사람이 되어있었고.
어느 여름날, 그와의 오랜 연애는 끝이 났다. 마음을 추스리기도 전에 또 마음을 다치고, 온갖 좋지 않은 일들이 떼로 몰려오는 바람에, 혼자 남은 동굴에서 한참 동안 웅크리고 숨어 있어야만 했다. 동굴 바깥으로 나아갈 기운도, 그 바깥 세계에 관심을 가져볼 용기도 없어 몇 년을 그냥 흘려보냈다. 뭉그러진 마음은 야속할 정도로 천천히, 느리게, 소리 없이 아물었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순간 나도 저자와 같은 생각이 들었던 거다. '낯선 사람들을 많이 만나보자.' 그리고 밖으로 조금씩 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의 세계와 가능성은 다시, 아주 조금씩 넓어지기 시작했다.
옛날에는 학교 안의 활달한 나와 학교 밖의 주눅 든 나 중에서 나만은 진짜 나를 알고 있다고 여겼지만. 이제는 정말로 잘 모르겠다. 어디까지가 배역이고 어디부터가 나인지. 항상 '인생은 레벨업이 아니라 스펙트럼을 넓히는 것이다'라고 믿는데, 옛날의 나보다 지금의 내가 더 레벨업한 버전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옛날의 나로부터 지금의 나까지를 모두 품은 내가 더 스펙트럼이 넓어졌다고는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더 넓어진 나야말로 더 나아진 나인지도 모른다. (30-31p)
예단하지 않기
누군가를 예단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어려우면서도 중요한 일인가. 서로를 예단하는 배경에는 각자의 자기중심적인 태도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지만, 결국엔 말과 행동으로 마음이 오가는 과정에서 오해를 낳는다.
'그 순간'에 있다는 것은 그만큼 집중한다는 의미다. 누구나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상대의 질문에 내가 대답하는 중인데 상대가 건성을 듣고 있다고 느낀 적 말이다. 내게 집중하지 않으면 누구나 바로 그걸 느낀다. 누가 그런 상대에게 자신에게 소중한 것, 이를테면 진심을 꺼내놓겠는가. (115-116p)
언젠가 영어권에서는 '상대가 말을 못 알아들으면 그 책임이 발화자에게 있기 때문에 상대가 알아들을 때까지 몇 번이고 정확히 설명해 줄 의무가 있다'는 말을 듣고 는 무릎을 쳤다. (…) 한국말은 말하는 사람에게 책임이 있지 않고 듣는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 그리고 듣는 사람은 상대가 말하지 않는 것까지 들어야 한다. 게다가 이 책임은 주로 관계에서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만 지워진다. (…) 내가 뭘 원하는지 콕 집어 말하지 않아도 상대가 알아채주길 바라는 마음도 어느 정도 선이 있지. 갈등으로 번질 때까지 말하지 않으면 서로 간에 불필요한 감정만 소모될 뿐이다. 제발 말을 하자. '그런 것까지 굳이' 말로 해야 한다. (172-173p)
20대의 언젠가는 그런 오해들이 너무 괴롭고 싫어서ㅡ물론 지금도 그렇다ㅡ이렇게 썼던 적이 있다.
(2008) 그때 생각은 이랬다. 생각이란 건 때로는 너무나 쉽게 변해버리지만, 한 번 남을 향해 '말'의 형태로 내뱉어버린 생각은 되돌릴 수가 없다. 게다가 그 생각, 혹은 나의 진심이라는 것은 '언어'를 통해서는 온전히 전달될 수가 없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무언가를 말이나 글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순수하거나 원초적인 그 이미지, 감정, 생각, 마음, 이런 것들을 단어로 바꾸고, 또 그 단어들을 조합해 몇 개의 문장으로 만드는 논리적인 폭력을 가해야만 한다. 애초의 것은 훼손된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대화라는 걸, 소통이라는 걸, 제대로 한다는 건 그 자체로 너무 어려운 일인데. 노력한다고 해도 내 마음대로 잘 안 되는 일인데. 나는 반성했다. 내 진심을 왜곡하지 않고 전하려고 '노력'이란 걸 해봤는지. 다른 사람의 진심을 왜곡하지 않고 받아보려고 노력해봤는지. 정말 귀 기울여보았는지. 내가 솔직하게 말하지 않았으면서, 내 마음의 '핵심'은 말하지 않고 겉돌았으면서 다른 사람이 내 진심을 몰라준다고 미워하진 않았는지.
지금도 반성한다. 지금까지 내가 했던 말은 얼마나 많이 왜곡되었나. 나 스스로가 '말'을 통해 내 진심을 얼마나 왜곡시켰나. 그 왜곡된 진심은 얼마나 무수한 오해를 낳았나. 그런 생각을 하면 아직도 마음이 쓰리다. 마음이, 말없이, 마음으로만 전달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마도 그런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이 글을 읽고, 한 친구가 답을 했던 기억이 난다. '마음이 말없이 마음으로만 전달될 수 있다면 - 지금은 4차 세계대전 중일 거다'라는(...) 친구의 말마따나, 말의 묘미란 때론 좋은 것이고, 말이 '좋은 것'이기 위해서는 위해서는 '잘' 해야 한다.
말하기의 또 다른 형태, 침묵
'말하기'를 다루는 책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사실 가장 좋았던 글은 '침묵에 관하여'였다. 글 전체를 필사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 정도로 좋았다. 침묵을 나눌 수 있는 사이. 서로가 서로의 존재에 이미 너무 자연스럽게 스며있어, 둘 사이에 무언가가 오가지 않아도 공허하지 않은 사이. 그런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관계일까. '침묵 속에서 고독은 용해된다' '짧게나마 완벽한 침묵의 대화를 나눈 사람들은 은빛 실핏줄로 이어져있다' 등의 아름다운 표현들이 마음에 녹아들었다.
대화가 잘 통하는 사이는 참 소중하지만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침묵을 나눌 수 있는 사이다. 이런 침묵은 몇몇 가깝고 특별한 사이에서 일어나는 대화의 한 형태다. 함께 나눈 수많은 대화와 함께 보낸 수많은 시간의 결과로, 우리 사이에는 실핏줄을 닮은 무언의 통로 같은 것이 생겨나 있다. 적어도 서로를 오해하지 않으리라는 신뢰와, 무언가를 함께 나누려는 마음이 거기 있음을 안다. (167p)
200페이지 남짓 되는 이 작은 책을 읽고. 한동안 말과 언어, 대화와 소통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글과 말에 가까운 직업을 오랫동안 해오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이 내게 더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 걸까. 말하기와 소통에 대한 통찰을 얻고 싶다면, 김하나 작가의 따뜻하고도 때론 날카로운 시각을 엿볼 수 있는 <말하기를 말하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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